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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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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9 20:49:01, 조회 : 725, 추천 : 52 |
은행잎 병아리
구준회
어디선가 병아리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영이는 눈을 들어 은행나무 쪽을 바라보았다. 강 쪽 가까운 둔덕에 이 마을이 자랑하는 어마어마하게 큰 은행나무가 있다. 사람들은 천년은 됐을 거라고 하기도 하고 그 보다 더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군청에서 보호수로 정한 후 세운 표지판에는 수령이 800년이라고 씌어 있었다.
늘어진 가지를 괸 버팀목이 두세 개 있었지만 그 수령에도 불구하고 이 은행나무는 봄이면 아기 손 같은 파릇파릇한 연두색 은행잎 순들을 피워 내고 여름엔 풍성한 그늘로 이 마을 할아버지 할머니들 경로당 노릇을 해주었다. 그늘이 넓어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도 이곳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 은행나무의 진수는 은행잎이 떨어지는 계절, 가을이었다.
가을이 되는 것을 마을에 가장 먼저 전해주는 것도 이 은행나무였다. 하나 둘 푸르던 잎이 노랗게 물들어 가기 시작하면 가을의 전령이 되는 것이다. 하루하루 갈수록 은행잎은 선명하고 농익은 노란색으로 변해가다 끝내 샛노란 한 그루 꽃나무로 변신하고 마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황금 산호처럼 서 있어 실로 화려하고 눈이 부셨다.
그 꽃나무가 꽃잎을 하늘에 반납하기 시작할 때면 가을은 깊어지고 있음을 말한다. 은행잎 노란 꽃송이가 하나 둘 날리기 시작하다가 어느 날부턴가 뭉텅뭉텅 노랗게 하늘에 날리며 떨어져 쌓여가는 것이다. 워낙 큰 나무다 보니 그 은행잎의 양도 엄청나 주변 일대가 노란 천지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 큰 나무에 붙어 있는 잎과 하늘에 날리고 있는 잎과 이미 떨어져버린 잎과 그 위로 또 덧쌓이는 잎으로 은행나무 아래 소나무는 노란 눈송이를 얹고 황금 트리로 변해버리고, 한참이라도 그 밑에 앉아 있노라면 사람도 노란 눈사람이 되가는 것이다. 이는 가을만 되면 한바탕 벌어지는 황금의 축제였다.
그 은행나무 옆에 영이가 살았다. 초등학교를 내년에 들어가야 하는 영이는 놀아 줄 또래 친구가 없어서 늘 심심했다. 그래서 엄마가 밭에 나간 뒤엔 강가에 나가 조약돌로 물수제비를 뜨기도 하고 철새가 보이면 가까이 다가가다 쫓아버리기도 하였다. 그런 영이가 어느 날 엄마와 읍내에 나갔다가 노란 병아리를 하나 사주어서 안고 왔다.
노란 솜털이 포근하여 뺨에 부벼보고 쓰다듬어보며 영이는 세상을 다 얻은 듯 연신 웃고, 안고 뒹굴었다. 병아리는 살아있는 영이의 장난감이었다. 먹이도 한 움큼씩 꺼내 방바닥에 놓아주고 먹을 것을 종용하였고 물도 방구석에 한 종지 떠다놓았다. 하룻밤을 자고나면 조금 큰 것 같아 두 손으로 들어보며 가늠해 보는 등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병아리도 영이가 뛰어가면 따라왔고 숨으면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 병아리가 귀여워 영이는 더 보듬고 볼에 부비곤 했다.
영이와 병아리는 은행나무 밑에 가서도 놀곤 했다. 은행잎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 영이와 병아리는 나무 밑을 돌기도하고 몇 잎 떨어진 은행잎을 주워다 주면 병아리가 작은 부리로 콕콕 찍어도 보며 놀았다. 바람이 조금 차가워지니 은행잎 떨어지는 숫자가 부쩍 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엔 간밤에 바람이 세게 불더니 엄청나게 은행잎이 떨어져 쌓여 있었고 계속 떨어지며 공중을 맴돌기도 했다. 노란 눈이 온 듯 켜켜이 쌓인 은행잎이 은행나무 밑에 펼쳐져 있었고 또 눈 내리듯 은행잎은 떨어지고 있었다.
영이는 병아리를 안고 은행나무 아래로 갔다. 발에 채이는 감촉이 푹신했고 어깨와 머리로 노란 잎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너무도 푹신해 영이는 은행잎 위에 누워버렸다. 얼굴에도 치마 위에도 노란 잎이 쌓인다. 영이는 은행잎을 손으로 움켜쥐고 허공으로 던져보다 팔딱 일어나 주변 은행잎을 두 팔로 끌어 모아 하늘로 날렸다.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듯 얼굴 가득 노란 은행잎으로 덮여 간질거렸다. 그러나 은행잎은 다른 낙엽과 달리 물기가 완전히 마르지 않아 얼굴에 감촉이 좋았다. 영이는 병아리에게도 낙엽을 날려주었고 병아리도 이리저리 피하며 분주했다. 영이는 더 많이 은행잎을 날리다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고 넘어지기도하며 은행잎 더미 위에서, 마침내 불어오는 강바람을 타고 날리는 은행잎 노란 물결에 휩쓸려 갔다.
그렇게 얼마를 놀다 영이는 병아리가 보이지 않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이는 병아리를 찾기 위해 은행잎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병아리 색깔과 은행잎 색깔이 같아 찾기가 힘들었다. 은행잎이 병아리고 병아리가 은행잎이었다. 어느 은행잎 더미 속에 들어갔는지 알 수도 없었다. 영이는 병아리를 부르며 은행잎을 종일 뒤적이며 찾았다. 그러나 찾고 또 찾아도 병아리는 발견할 수 없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병아리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은행잎이 노랗게 쌓인 은행나무 아래를 볼 때마다 은행잎이 병아리로 보였다. 아빠와 엄마는 “ 은행잎이 좋아 은행잎하고 같이 좋은 데로 갔나보다”고 했다. 그리곤 강가에 나가 종이배를 띄우자고 했다. 영이는 작은 손으로 은행잎을 종이배마다 소복이 태워 띄워 보내 주었다. 노란 은행잎 배는 강물을 따라 무수한 병아리로 변해 떠내려갔다. 오늘도 영이는 은행나무에서 은행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자꾸 병아리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08/11
<불사조의 아침. (도)나무와 숲.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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