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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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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9 20:50:58, 조회 : 689, 추천 : 50 |
시골 정거장
어느 시인이 세상의 모든 그리움은 모여 함박눈이 된다고 했던가.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움이 많았었는지 함박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하늘을 덮고 산을 덮고 집을 덮고 길을 덮어 세상은 하얀 백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백지는 모든 것의 시작이고 끝이라 했던가. 눈은 세상을 지웠다가 다시 그리고 싶다는 듯 한 가지 색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 백지의 세상을 연결하는 것은 이 시골에서는 시외버스 밖에 없었다. 외진 시골이다 보니 시외버스가 하루에 한번 밖에 지나가지 않았다. 가끔은 고장이 나서 오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버스는 눈을 하얗게 쓰고 체인을 짤깍거리며 느릿느릿 저 모퉁이를 돌아 다가 올 것이다. 늙은 할아버지 운전기사는 투덜거리며 이 정거장에 설 것이고 삐꺼덕거리며 차문이 열릴 것이다. 그러면 몇 명의 아줌마와 아저씨가 내리고 몇 명의 아줌마와 아저씨가 탈 것이다. 그리고 버스는 또 갈 길을 갈 것이다.
시골 버스 정거장엔 가끔은 사람이 있고 가끔은 사람이 없다. 하얀 바탕에 빨간 글씨로 시외버스라고 쓴 정거장 표지판은 이미 눈이 달라붙어서 하얗게 형체만 남아, 이곳이 정거장인걸 아는 사람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오늘은 그 정거장에 할머니 한분이 서 계신다.
할머니는 큰 가방 하나에다 큰 보자기로 싼 보따리가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삿짐 보따리처럼 보였다. 할머니는 가방과 보따리에 쌓이는 눈을 가끔 털어주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날엔 떠나는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것이 정상이었다. 눈은 떠나게도 하지만 떠날 수 없게도 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눈이 펑펑 내려 멀리까지 보이지 않는데도 하염없이 버스가 올 방향을 바라보며 눈을 맞고 있었다.
버스는 저 눈발 속을 헤치고 올 것이다. 앞창을 브러쉬로 밀어 부채살같은 이마를 하고 헤드라이트불을 켠 두 눈을 휘둥이며 엉금엉금 올 것이다. 그러면 열리는 문으로 보자기보따리를 먼저 싣고 큰 가방을 실을 것이다. 할머니라며 젊은이가 뛰어 내려와 도와 줄 것이다. 고맙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머리와 옷에 쌓인 눈을 털고 버스의 계단을 올라가 빈 앞자리에 앉을 것이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안면 있는 사람이 보이면 인사를 나누고 아들 집에 간다고 말할 것이다.
아들이 외국에서 와 이달 그믐께 데리러 온다는데 손자가 보고 싶어 내가 먼저 찾아가는 길이라고 말 할 것이다. 그러면 부럽다고 할 것이고 아이구 뭘 그려 라고 응수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가서 고속버스로 갈아타고 가면 서울 아들네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은 어떻게 변했을까. 미국 가 박사를 따고 대학 교수가 되어 왔다는데 못 본지가 다섯 해가 지났다. 손자 놈은 어떻게 생겼을까 세 살 때 보고 못 봤으니 어언 여덟 살이네. 까불이가 의젓해졌을 것이다.
그래 오랫동안 부모 노릇 못했으니 이 보따리의 떡과 산나물을 풀어 놓고 실컷 먹여봐야 겠구나. 아들이 쑥으로 만든 진짜 쑥떡을 그렇게도 좋아했었는데, 산나물 야들야들한 걸 들기름 넣고 볶으면 밥을 두 그릇씩 먹었었는데, 지금 입맛이 변했어도 고향의 맛인데 어디 갈라구. 손주 줄라고 지난 장날에 가서 두툼한 잠바와 따뜻한 바지도 한 벌 샀고 며느리 선물도 준비했는데 이것들을 맘에 들어 할라나. 할머니는 다시 보따리와 가방에 쌓인 눈을 털며 길 저쪽을 바라보았다.
가로수 앙상한 가지도 함박눈을 얹고 소담하게 산호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논밭은 눈으로 경계를 알아 볼 수 없이 평지가 돼있었고, 하늘이 뚫린 듯 계속 눈이 내려 사방을 분간 할 수 없는 백색 천지다. 그나마 바람이 없어 춥지 않고 눈발이 고요하게만 내려 쌓여가고 있었다. 할머니가 밟고 온 발자욱과 가방을 끌고 온 자욱도 이미 눈이 지워 길은 솜이불을 덮은 듯 포근해 보였다.
“ 아이구 아직도 버스를 기다리고 서 계시유.”
돌아보니 한참 전 어딜 가시냐고 인사를 하고 갔던 동네 아저씨와 초등학생 딸이었다. 모자에 눈이 소복하다.
“ 오늘은 버스가 안 올라나 봐유. 버스 도착 시간 넘긴지가 이미 세 시간이나 지났시유. 오늘은 언능 들어가시고 낼 떠나시유. 눈 때미 버스 오긴 글렀슈.”
“ 아녀 올껴.”
“ 올거면 벌써 왔쥬.
“ 아녀 올껴”
“ 이잉 틀렷다니께유.”
“ 아녀 올껴.”
아저씨는 계면쩍어져서 더 이상 말을 건네지 못하고 팔짱을 낀 채 딸 보다 앞장서 종종 걸음으로 가던 길을 갔다.
눈발은 더 커지는 듯 했고 버스 정류장 표지판도 철봉까지 눈이 달라붙어 아이스크림 막대를 세워놓은 듯 보였다. 아저씨는 걸어가지만 딸아이는 뒤를 돌아보고 잠시 섰다가 가기를 여러차례 한다.
멀어질수록 할머니의 모습은 눈사람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딸아이가 더 걸어가다 돌아보니 할머니와 보따리가 흰 솜사탕처럼 보였다. 더 가다 돌아보니 할머니는 한 점 함박눈발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눈발이 아무리 앞을 막아도 멀러질수록 할머니만은 더 환해지며 또렷히 보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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