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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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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0 17:17:40, 조회 : 579, 추천 : 30 |
<미니픽션>
백 띠 무패
구 준 회
장화를 신어야 하는 진흙길 2킬로미터,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던 45도 각도의 교문 앞 100미터 언덕길. 헐떡이며 들어서면 돌밭 운동장. 아무것도 없다. 그 앞에 덩그렁 교실 건물 한 채. 뒤로는 바위 숲 산. 이게 신설학교인 우리의 중학교였다. 신입생 등록하러 학교 방문한 후 입학식 전에 50여 명이 전학을 갔단다. 우리는 산을 깎으며 불도저가 밀고 지나간 드넓은 돌밭을 운동장이라 불렀다. 그곳에서 체육시간마다 돌을 옮기고 고른 후 시멘트를 부어 굳힌 드럼통을 끌며 운동장 정지작업을 해야 했다 졸업 때까지.
6개월 정도 지나니 공차기를 할 수는 있었으나 축구라도 하다 넘어졌다 하면 빨간약으로 온몸을 도포해야 했다. 이사장은 체육교사를 무도인으로 배치하고 체육복을 태권도복으로 바꿨다. 체육이 태권도요 태권도시간이 체육시간이었다. 우리는 뛰지 않고 제자리에서 기마자세를 하고 정권지르기, 옆차기, 상단 막고 뒤돌려 차기를 배웠다. 태극1장 준비! 앞차기! 얏! 체육사범님의 구호에 맞춰 한 장 한 장 태권도 기본기를 연마하며 대련, 즉 겨루기로 시간을 이어 갔다.
태권도를 배워 나가며 승급시험을 치렀고, 흰 띠에서 노란 띠로 파란 띠로 빨간 띠, 급기야 검은 띠로 승단을 해 나갔다. 졸업시점에는 대략 국기원에서 단증을 발급 받는 유단자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멀리서 봐도 체육 수업하는 반이 몇 학년인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흰 띠, 노란 띠 매고 체육 수업을 하는 반은 1학년이었고 청 띠, 빨간 띠 맨 반은 2학년, 3학년 형님들은 묵직한 검은 띠 물결을 이뤘다. 보기 좋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1학년의 구령 소리와 정권지르기는 어설펐으나 3학년이 구령소리를 붙이는 것은 간결하지만 힘의 깊이가 느껴졌고, 발차기, 정권지르기를 하면 고요한 가운데 도복이 일치되게 바람을 가르는 척척 하는 소리가 심오하게 운동장에 퍼졌다. 운동장이 심신수련의 도장이 되어 갔다.
그러나 일치되게 반 전원이 같은 색깔 띠를 매지는 않았다. 개중에는 흰 띠도 노란 띠도 빨간 띠도 드문드문 섞여 뒤 쪽에 서서 태권도를 배웠다. 이유는 가난이 평준화되었던 시절이라 승급·승단비가 없어 승급 승단을 미처 하지 못한 학생들이 많았던 것이다. 또 학교 오기 전에 태권도를 배워 높은 띠를 딴 학생들도 가뭄에 콩 나듯 있었다. 이미 2단까지 따고 들어온 고수들도 있었다. 그들이 시간과 돈을 얼마나 투여하여 습득한 기술인가는 대련을 해보면 역시 알 수 있었다. 검은 띠와 빨간 띠가 붙으면 차이가 나듯 초단과 2단이 붙으면 또 볼 만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의 대련을 신기해하며 지켜봤다. 초단이 비호같이 날아 발차기, 뒤돌려 차기, 이단 옆차기를 풍차 돌리듯 정신없이 가해도 2단은 뒤로 한 발자국, 옆으로 한 발자국, 또는 머리를 숙이거나 허리를 살짝 돌려 피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초단이 막 공격해 들어올 때 동시에 떠서 지르면 보기 좋게 초단은 나가떨어지는 것이었다.
자세히 슬로우 모션으로 보면, 초단이 공격을 위해 몸자세를 공격으로 전향하여 뛰어오르면 어쩔 수 없이 방어가 풀리게 되는데 이때 2단이 거의 동시다시피 공격을 피하는 자세로 틀며 초단의 그 허점 부위를 잽싸게 차거나 지르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로 경계하며 빙빙 돌 때는 서로 빈틈이 없다가 상대가 공격을 할 때 드디어 공격할 기회가 오는 것이다. 기술이 써지는 바로 그 한 순간의 성공이 우리를 긴장하게도 희열을 느끼게도 만들었다.
그런데 그 2단이 지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것도 백 띠에게. 우리 반에 골통이 하나 있었는데 선생님 말도 잘 안 듣고 잠이나 자며 수업시간도 잘 빠지는 문제아가 그 아이였다. 그 아이가 백 띠였다. 승급에 별 관심도 없고 심사를 받아 본 적도 없었다. 선생님은 그 아이와 2단이 대련을 해보라 하셨다. 아이들은 너무 격차가 나 싱거운 일로 의아해 할 뿐이었다. 대련이 시작되었다. 2단이 빙빙 돌다 백 띠를 가볍게 공격했다. 그 순간 2단은 억 소리와 함께 배를 쥐고 운동장바닥에 나뒹굴었다. 순간적인 일이라 아이들은 눈이 동그래지며 비명을 질렀다. 이럴 수가, 무적의 2단을 그것도 한방에. 어쩌다 실수겠지. 아이들은 2단을 부축해 다시 일으켜 세웠다. 또 대련 시작. 2단이 자존심도 상하고 화가 났는지 2차 공격을 감행했다. 그런데 또 억하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워낙 백 띠가 빨라 그 공격 형태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선생님은 백 띠를 보고 말했다
“너 전에 태권도를 배웠었구나.”
“태권도 배운 적 없는데요”
“그래, 그럼 다른 무술 배웠냐?”
“아뇨 배운 건 아무 것도 없어요. 근데 저도 모르게 쌈하면 이겨요.”
“ 짜식 그런 게 어딨냐, 건방지네. 다시 한번 다른 애하고 해봐.”
다른 2단과 대련이 붙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대련하는 장면을 자세히 보니 태권도 폼이 아니었다. 상대의 허점을 탐색하다 공격하거나 노리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눈빛이 대련 시작 구호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확 변하는 것이었다. 멍청하던 눈빛이 살기가 띄듯 번들거리며 번쩍이다가 순간 섬광을 발하는 듯할 때는 이미 상대의 어느 부위를 가격한 뒤였다.
그때 별로 근육으로 안 보이던 주먹과 팔과 가슴 근육이 순간적으로 고무줄 뭉치듯 확 뭉치며 울퉁불퉁 굵어지는 듯이 보였다. 상대 공격을 피하지도 몸을 흔들거리지도 않았다. 다만 상대방 눈만 총 쏘듯 바라보다 상대가 움직이면 무식하게 한 방, 끝내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백 띠에게 말했다.
“ 야, 아버지가 현역 조폭이라는 애가 너냐?”
“ 예? 아 예.”
“ 타고난 천성은 어쩔 수가 없구나. 알았다. 반장, 오늘 수업 끝.”
선생님은 혀를 끌끌 차더니 교무실 쪽을 향했다.
우리는 도복 끈을 풀며 백 띠 애에게 물었다.
“ 야, 너 워째 그리 쌈을 잘하냐. 너 쌈 할 때 무섭거나 두렵지 않냐?
그 아이가 말했다
“ 그게 뭔데? 무섭다, 두렵다? 난 원래 그런 마음 자체가 없어. 그게 뭔지 몰라. 그냥 나도 모르게 쌈이 돼.”
그 뒤로 운동장은 조폭의 후예가 지배하는 조폭수련의 도장으로 탈바꿈해 나갔다. 역시 거친 운동장이었다.
<월간 체육지 2011년9월호 /대한체육회 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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