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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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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9 02:52:06, 조회 : 438, 추천 : 22 |
바람의 길
구준회
대학 캠퍼스의 잔디밭엔 풀빛이 싱그럽고 삼삼오오 남녀 학생들이 탱탱한 엉덩이로 풀들을 짓누르며 낭만을 입맞춤하고 있더군. 아, 지겨운 젊음과 낭만이란 놈을 말이야. 하 왜 그렇게 시니컬하게 얘기 하냐고? 젊어도 대학가의 낭만을 누릴 수가 있을 때 젊음이 젊음답지 학교 졸업하는 때까지 견디며 허덕대야하는 젊음은 차라리 짐이지. 그렇게 밖에 못 지냈냐고? 그래, 70년대 우리 또래 대학생의 상당수는 학비를 벌어 고학하다시피 했지. 잔디 깔아뭉갤 시간 있는 학생들은 하늘의 각별한 천복을 타고난 특별한 분들이 아니었것어? 나야 사방 어딜 봐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던, 희망도 모르고 하루하루 견뎌나가야 했던 회색 안개 그 자체였어. 찬찬히 얘기할게.
대학 때 점심시간이 되면 갈등을 해야 했어. 주머니를 조몰락거리면 동전의 크기와 개수 그리고 액수가 뇌에 입력되는 거야. 둘 중에 한 가지만 할 수 있다. 250원 하는 라면을 먹어 뱃속을 행복하게 할 것인가 250원짜리 삼중당 문고 책을 한 권 사서 마음의 양식으로 대체할 것인가. 투비 오아 낫 투비 잇어 퀫션이지. 고독하게 그러나 과감하고 명쾌하게 서점 문을 밀것이냐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자연스럽게 식당 문을 밀것이냐. 결론은 백여 권의 문고를 지금도 소유하고 있다는 거지. 책꽂이에 바랠 대로 바랜 문고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마 그것이 삼양라면 한 끼씩이 꽂혀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일지 몰라. 한 권만큼의 배고픔이 한 권만큼의 속쓰림이 눈 치켜뜨고 꽂혀 있으니까 말이야. 배곯는 젊음이 싫었거든.
수업을 마친 후 우리 과 학생들은 7교시니 8교시니 하며 막걸리 집으로 자리를 옮겨 시와 소설과 인생을 논하곤 했지, 난 빼고 말이야. 난 어디 가냐고? 난 한 학기 학자금 은행 융자금을 다달이 갚아야 해서, 백묵 들고 가정교사 하러 이집 저집을 떠돌아야 했거든.
일을 마치고 밤 아홉 시쯤 되면 저녁도 못 먹은 상태라 탈진하지. 그 때 주머니를 뒤져본 후 가는 곳이 시장 통 순댓국집이었지. 소주 두 잔을 시키면 순댓국집 아줌마가 알아서 국물에 순대 두어 첨 넣어 서비스를 주거든. 빈속에 소주를 더 먹을 수도 없어.
‘무엇이든 들어오기만 해봐라 알알이 흡수해 버릴 테니까’
하며 처절히 기다린 빈 속에 소주 한잔이 들어가면 모든 게 초토화되는 거지. 배고픔이 마취되는 거야. 그리곤 취한 소리로 막걸리에 삶의 고단함을 풀어내는 청소부 아저씨, 노점상 아저씨들 얘기를 귀동냥하며 아득히 시장 통 젊은이가 돼버리는 거야. 소설이나 시의 소재를 찾아본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들어보면 들어볼수록 살기가 만만치 않고 세상은 회색이란 생각만 들었지.
그래, 나도 연애라는 걸 해봤어.
여자엔 숙맥이어서 만남을 가져도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어. 하려던 말도 막상 만나면 머릿속이 하얘져서 초조히 성냥개비만 부러뜨렸던 것 같아. 지금 나이만큼 편하게 얘기를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
학교 축제가 있을 가을이 되면 축제 파트너를 구한다고 미팅이라는 걸 하고 어색한 약속을 하여 축제에 참여하곤 하지. 저학년 땐 준비 없이 축제에 혼자 참여 했다가 소외감을 느껴선지 3,4학년 때는 거의 그래.
문제는 그놈의 돈이야. 젊음과 시간과 기회는 남아나는데 그놈의 돈은 아무리 둘러봐도 없는 거야. 그러니 당연히 인품과 말품과 발품 밖에 팔 게 없게 돼. 인품이 부족하니 말품이 변변찮아 대화가 낭만적이질 못하지. 신경은 주머니에 가있으니 마음의 여유가 발동될 리 없잖아. 그나마 쓸 만 한 건 튼튼한 두 다리 밖에 없어. 그냥 파트너 끌고 걷는 거지. 왈 보건데이트라는 거야. 참 많이 걸었네.
한번은 겨울에 학교 근처에서 만난거야. 라면으로 저녁을 우아하게 먹은 것 까지는 환상이었어. 만난 지 얼마 안돼서 서먹한 처지였지. 라면집을 나온 뒤 황량한 대지에 팽개쳐지는 거야. 주머닌 깨끗했고 궁리를 해보아도 방법이 바닥이야. 걷다보니 어느 덧 한강대교에 다다르더군. 겨울에 한강대교를 걸어본 적 있어? 바람, 바람의 철로역경이지.
싫다는 말을 안 하기에 그냥 발길을 내 딛었지. 그나마 바람이 초입에는 별로 없었거든. 그런데 점점 중간까지 나아가니 장난이 아니야 세찬 바람이 얼굴을 때리는데 돌아갈 수도 그냥 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더군. 무식하면 용감해진다고, 무식한데 용감하면 천하무적이라고, 스스로를 다짐하며 용감하게 그 교량을 다 건넜지 몇 킬로 미터짜리 인지 모르겠는데 한 시간은 걸린 것 같아. 건너자마자 버스 타고 각각 헤어졌지.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어. 소식이 없기에 내가 전화를 했더니 ‘이젠 그만’ 만나야 되겠다는 거야. 이유를 알고 본 즉 아무소리 못하고 끊었네.
그날 한강대교를 건넌 후 겨울바람에 얼굴이 언데다 바람에 타버려서 닷새나 밖을 못나가고 피부과 다녔다네. 유구무언 할 말이 없더군. 나 바람에도 탄다는 거 그때 첨 알았거든. 그 한강, 회색 바람이 불던 한강, 인연마다 재를 뿌리던 한강의 회색칼라를 오랫동안 저주했지.
<그 길을 견눈질하다 우리글 미니픽션4 .(주)우리글 2012.2.10>
<문학나무 45호 2012 겨울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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